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따른 행위는 정당행위가 될 수 없다


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따른 행위는 정당행위가 될 수 없다.

가. 대법원 1988.2.23. 선고 87도2358 판결
나.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2. 판시사항 및 판결 요지

가. 피해자의 머리를 잡아 욕조의 물속으로 누르게 될 경우 질식현상 등에 대한 예견가능성의 유무

양손을 뒤로 결박당하고 양발목마저 결박당한 피해자의 양쪽 팔, 다리, 머리 등을 밀어누름으로써 피해자의 얼굴을 욕조의 물속으로 강제로 찍어누르는 가혹행위를 반복할 때에 욕조의 구조나 신체구조상 피해자의 목 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릴 수 있고 더구나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반항하는 피해자의 행동을 제압하기 위하여 강하게 피해자의 머리를 잡아 물속으로 누르게 될 경우에는 위 욕조의 턱에 피해자의 목부분이 눌려 질식현상 등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칙상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다.

나. 상관의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과 하관의 복종의무

공무원이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상관은 하관에 대하여 범죄행위 등 위법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할 직권이 없는 것이고, 하관은 소속상관의 적법한 명령에 복종할 의무는 있으나 그 명령이 참고인으로 소환된 사람에게 가혹행위를 가하라는 등과 같이 명백한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인 때에는 이는 벌써 직무상의 지시명령이라 할 수 없으므로 이에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다. 상관명령에의 절대 복종이 불문률로 되어 있는 경우 위법명령에 따른 행위가 정당행위 내지 강요된 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

설령 대공수사단 직원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 불문률로 되어 있다 할지라도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고문행위 등이 금지되어 있는 우리의 국법질서에 비추어 볼 때 그와 같은 불문률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고문치사와 같이 중대하고도 명백한 위법명령에 따른 행위가 정당한 행위에 해당하거나 강요된 행위로서 적법행위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피 고 인】 피고인 1외 4인
【상 고 인】 피고인들
【변 호 인】 변호사 이남진(피고인들을 위한)변호사 김성만(피고인 1을 위한)변호사 설동훈(피고인 2를 위한)변호사 변갑규(피고인 3을 위한)
【원심판결】 서울고등법원 1987.10.19 선고 87노2667 판결
【주 문】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판결이유】

1. 피고인 1과 그의 사선변호인 변호사 김성만, 피고인 2의 사선변호인 변호사 설동훈, 피고인 4, 국선변호인 변호사 이남진의 위 피고인들에 대한 각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위 논지의 요지는, 피고인 1은 피해자를 구타한 사실이 없으며,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제1심판시의 두번째의 고문행위는 피고인이 참고인으로 연행되어 온 하종문에 대한 수사기록을 가지러 제14호 신문실에 간 사이에 부하직원들인 상피고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졌다는 것이고, 피고인 2는 역시 피해자를 구타한 사실 및 피해자의 양손 또는 양발을 수건으로 결박한 사실이 없으며 두번째의 고문행위시 자신이 욕조 물속에 들어가 한번 피해자의 머리를 욕조 물속으로 눌렀으나 물이 차거워서 곧 물 밖으로 나와 욕조의 턱위에 서 있는 사이에 상피고인 3, 5, 4등이 피해자에 대한 고문행위를 수차 반복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경부압박으로 인하여 질식사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피고인 4는 상피고인 1의 지시에 따라 범행현장에서 떨어진 제14호 신문실에서 참고인 하종문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그후 범행현장인 제9호 신문실에 있을 때에는 고문행위가 거의 끝나 있어 피고인 1의 지시에 따라 그곳 욕조 턱에 축 늘어져 있던 위 피해자의 다리를 잡아 침대로 옮겼을 뿐이라고 각 변소하면서, 위 각 변소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책임이 무거워질 것을 두려워 하여 책임전가에만 급급한 상피고인들의 상호 모순된 검찰에서의 진술 및 신빙성이 없는 제1심증인 하종문의 증언등을 믿어, 위 피고인들의 변소를 받아 주지 아니한 채 제1심판시의 이 사건 범죄사실을 인정하였으니 이는 채증법칙을 위배하거나 심리미진으로 인하여 사실을 오인한 위법이 있다고 함에 있다.

그러나 공판정에 현출된 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있는 이상 법원은 자유로운 심증에 따라 그중 일부 증거를 믿고. 이에 배치되는 증거를 배척할 수 있다할 것인 바, 원심판결과 원심이 유지한 제1심판결이 들고 있는 증거를 기록과 대조하여 검토하여 볼 때, 위 피고인들의 각 변소사실에 일부 부합하는 증거를 배척하고 나머지 증거에 의하여 위 피고인들의 판시 범죄사실을 인정한 원심판결에 채증법칙을 위반하고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여 사실을 그릇 인정하였다고 볼만한 위법을 가려낼 수 없으므로 논지는 모두 이유없다.

2. 피고인들의 국선변호인 변호사 이 남진의 상고이유 제2점에 대하여,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4조의2 제2항 위반죄는 결과적 가중범으로서 행위자에게 폭행 또는 가혹행위의 범의 외에 사망의 결과에 대한 예견가능성이 있음을 요한다 함은 논지가 지적하는 바와 같으나,

원심이 적법하게 확정한 바와 같이 양손을 뒤로 결박당하고 양발목마저 결박당한 피해자의 양쪽팔, 다리, 머리 등을 그 판시와 같은 방법으로 밀어누름으로써 피해자의 얼굴을 욕조의 물속으로 강제로 찍어 누르는 가혹행위를 반복할 때에 욕조의 구조나 신체구조상 피해자의 목 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릴 수 있고, 더구나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반항하는 피해자의 행동을 제압하기 위하여 강하게 피해자의 머리를 잡아 물속으로 누르게 될 경우에는 위 욕조의 턱에 피해자의 목 부분이 눌려 질식현상 등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칙상 어렵지 않게 예견할 수 있다 할 것이고,
나아가 피고인들의 위와 같은 가혹행위와 피해자의 사망과의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있다할 것이므로

원심이 피고인들을 결과적 가중범인 위 법조 위반으로 의율한 조치는 정당하고 거기에 결과적 가중범에 있어서의 예견가능성 또는 인과관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할 수 없으므로 이 점을 다투는 논지 또한 이유없다.

3. 피고인들의 국선변호인 변호사 이남진, 피고인 3의 사선변호인 변호사 변갑규, 피고인 5, 4의 각 상고이유 중 책임조각사유 주장에 대하여,

피고인 23, 같은 반금곤 , 4등의 원판시 소위는 상사인 상피고인 1의 명령에 따른 정당한 행위에 해당하거나 절대적 복종관계에 기한 강요된 행위이기 때문에 책임이 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나,

공무원이 그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상관은 하관에 대하여 범죄행위 등 위법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할 직권이 없는 것이며, 또한 하관은 소속상관의 적법한 명령에 복종할 의무는 있으나 그 명령이 참고인으로 소환된 사람에게 가혹행위를 가하라는 등과 같이 명백한 위법 내지 불법한 명령인 때에는 이는 벌써 직무상의 지시명령이라 할 수 없으므로 이에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할 것이고(당원 1980.5.20 선고 80도306 판결 참조),

설령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직원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과 같이 불문률로 되어있다 할지라도, 국민의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고문행위 등이 금지되어 있는 우리의 국법질서에 비추어 볼 때 그와 같은 불문률이 있다는 점만으로는 이 사건 판시 범죄와 같이 중대하고도 명백한 위법명령에 따른 행위가 정당한 행위에 해당하거나 강요된 행위로서 적법행위에 대한 기대가능성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더우기 일건 기록에 비추어 볼때 위와 같은 위법한 명령이 피고인들이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이나 방어할 방법이 없는 협박에 상당한 것이라고 인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피고인들이 그 당시 그와 같은 위법한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특별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적법행위를 기대할 수 없었다고 볼만한 아무런 자료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같은 취지로 위 피고인들의 주장을 배척한 원심의 조처는 정당하고, 논지는 이유없다(위 당원 80도306 판결 참조).

4. 피고인들과 피고인들의 각 변호인의 양형부당의 주장에 대하여,

(가) 피고인 1에 대하여,

일건기록에 의하여 양형의 조건이 되는 피고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이 사건 범행의 동기, 범행에 있어서의 피고인의 지위 내지 역할, 수단과 결과, 범행후의 정황, 이 사건 범행이 국가와 사회에 끼친 영향, 위 피고인이 이 사건 이전까지 대공수사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 공로도 적지 아니하였던 점 등의 정상을 참작하더라도 원심의 위 피고인에 대한 형이 무거워서 부당하다고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나)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하여,

피고인들에게 징역 10년 미만의 형이 선고된 이 사건에 있어서 형의 양정이 부당하다고 하는 것은 형사소송법 제383조의 규정에 의하여 적법한 상고이유가 되지 아니한다.

5. 따라서 상고를 기각하고, 상고후의 구금일수 중 각 일부를 피고인들에 대한 각 본형에 산입하기로 관여법관의 의견이 일치되어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법관    최재호(재판장)  정기승  김달식

[박종철: 위키피디아]

박종철(朴鍾哲, 1964년 4월 1일 ~ 1987년 1월 14일, 부산광역시 출생)은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에 공안당국에 붙잡혀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이 사실을 은폐하려던 군사독재정권의 불의는 당연히 민중들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항의인 6월 항쟁의 계기가 되어,시민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가. 생애

1964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으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언어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 15일 징역 10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나. 사망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박종철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였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항쟁의 불씨가 됐다. 1987년 중앙일보의 기자 신성호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14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자 다음날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발표 했다. “탁 치니 억”은 한동안 군사정권의 궤변과 비도덕성을 조롱하는 유행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어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 오연상의 진술을 확보했다. 1월 14일 경찰의 요청으로 대공분실 509호를 제일 먼저 목격했던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은 1월 16일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고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다. 폭로

경찰은 14일 밤에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보존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했다. 부검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화 회유를 물리치고 1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내용을 받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중 하나로 지목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한편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이였던 이부영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노력으로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라. 추모 활동

박종철은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으며, 이와 별도로 김일성종합대학 명예학생으로 추서되었다. 유족과 당시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세운 그의 추모비와 흉상은 학내 ‘민주화의 길’ 가운데 한 지점으로 지정되어 있다.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박종철 열사의 꿈을 받들고 기리기 위해 박종철기념사업회가 만들어 졌다. 이 사업회는 2007년 박종철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문들과 대학문화연구회 회원들의 모금으로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로 되었으며, 박종철인권상을 제정하고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는 등 여러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국가기록원]

1. 시기
 1987년 1월 14일.

2. 관련인물과 사건전개

 가. 관련인물

박종철(고문치사자), 조한경 경위, 강준규 경사,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고문 경찰관), 오연상(현장 임장 의사), 황적준(박종철 부검의사), 박정기(박종철의 부), 강민창(치안본부장), 박처원(치안감-대공담당 5차장) 등 다수.

 나. 사건전개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새벽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경찰이 그를 연행한 이유는 박군의 고교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대공분실 수사관들은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오전 10시 40분경부터 9호 조사실로 장소를 옮겨 박종철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수사관들은 조사실 욕조에 물을 채우고,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묶은 채 그의 머리를 욕조 안에 집어넣으며 소위 ‘물고문’을 시작했다. 수차례 물고문 끝에 박종철은 오전 11시 20분경 조사실에서 사망하였다.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대외적으로 사건을 비밀에 붙인 채 가족들에게만 통보하고 사건을 가급적 조용하게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추적 끝에 15일 오후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짤막한 2단기사가 사회면에 실렸다. 그날 오후 6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박종철 군의 사망사실을 시인하고 이를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박군이 조사를 받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하였으며, 수사관들은 일체의 가혹행위를 한 바 없다고 하였다. 기자회견에 배석했던 치안본부 대공담당 5차장 박처원 치안감은 “수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박종철이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을 했다. 이후 1월 15일 저녁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의 집도로 박종철의 사체부검이 있었다. 그리고 16일 오전 박종철의 시신은 부산시 수도국 말단 공무원으로 그를 키웠던 아버지 박정기에 인도되어 경찰의 회유와 협박 속에서 벽제에서 화장되었다.

경찰의 은폐기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진상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박군 사망 직후 대공분실 조사실에 처음 불려간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상은 자신이 조사실에 도착했을 때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박군은 이미 사망해 있었으며, 몸에 멍든 자국이 있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한편, 박군을 부검한 황적준 박사가 박종철의 사인을 ‘쇼크사’가 아닌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발표하여 물고문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부검소견서를 사실대로 작성하였다. 이에 언론들은 일제히 물고문 의혹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경찰수뇌부는 고문치사 사실은 인정하되 사건과 관련 있는 책임자를 축소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1월 19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기자회견에서 경찰특별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조한경 경위와 강준규 경사가 박군에게 가혹행위를 하여 죽었음이 확인됐다고 발표하면서 일부 수사관의 지나친 직무의욕 때문이라고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조 경위와 강 경사는 이날 저녁 구속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는 검찰로 넘어갔고, 당시 검찰은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은 구속 기소된 경찰관 2명 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그치지 않았고, 추가적인 폭로가 이어져 경찰의 명예와 신뢰는 추락하고, 검찰의 소극적인 자세가 도마에 올랐다.

1987년 5월 18일 카톨릭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축소·조작되었음을 발표했다. 또 처음 구속된 조한경과 강진규가 교도소에서 “고문에 참가한 사람은 많은데 우리만 구속된 것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을 당시 같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이 일명 ‘감방통신’을 통해 외부에 유출했다. 이런 일련의 추가폭로에 검찰은 “사제단의 주장은 사실무근이며, 어떻게 그런 주장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조사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여론이 악화되자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하여 대공분실의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을 고문혐의로 추가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발표에도 경찰지휘부가 이 사건 축소은폐에 관련되어 있다는 폭로가 이어지자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치안감, 대공수사 2단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 등 간부들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검찰은 위 간부들이 박 치안감의 주도 하에 먼저 구속된 두 경찰관의 가족을 만나 설득했고, 두 사람이 수감되어 있던 의정부교도소로 찾아가 면회하면서 두 사람 명의로 5,000만 원 짜리 개발신탁장기예금 2계좌씩 2억 원을 가입한 예금증서를 보여주며 회유했다고 했다.

988년 1월 박종철의 사체를 부검했던 황적준 박사의 일기장이 공개되었다. 이 일기장에는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강민창이 황적준 박사에게 고문치사를 은폐하기 위해 박군의 사인을 ‘심장 쇼크사’로 해달라고 압박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에 강민창은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치안총수가 구속되어 교도소에 가는 엄청난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3. 이 사건의 의의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경찰의 조작과 은폐기도, 검찰의 사건축소 기도와 엄포 등으로 전 국민적인 분노를 자아냈고, 결국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만 21세의 전도유망한 서울대생이 선배의 소재를 추궁당하기 위해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아 죽어가는 현실을 보면서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를 터트렸고, 여기에 저항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진실과 그것을 이야기 하는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일깨우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박종철 사건 직후인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특별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한  강론의 일부를 보자.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 한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니 “탁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의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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