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동인 사건


1. 개요

가. 사건명: 서울고등법원(제7행정부)2011.10.27.선고 2010누43206 친일반민족행위결정취소

나. 결과: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 7. 10. 망 김동인의
행위에 대하여 한 각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취소한다라는 판결을 구한 원고의 항소를 기각함.

2. 판결 이유

1. 처분의 경위

. 김동인은 1900. 10. 2. 평양에서 출생하여 1915년경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1919년경 귀국한 후 1951. 1. 5. 사망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인 ‘창조’를 발간하고,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한 이후 여러 편의 단편·장편소설들과 산문, 평론 등을 발표한,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원고는 김동인의 아들이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 7. 10. 김동인이 1938년경부터 체제협력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고 판단하면서 김동인의 다음과 같은 행위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특별법’이라 한다) 제2조 제11호, 제13호에 규정된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하였다(이하, ‘이 사건 처분’이라고 한다).

1) 반민특별법 제2조 제11호 해당 행위
김동인은 1944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반도민중의 황민화 - 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총 10회 연재), 「일장기 물결 -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등의 산문을 통해 학병, 징병을 선전, 선동하였다.

2) 반민특별법 제2조 제13호 해당 행위
망인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백마강」과 1938년과 1942년에 각 매일신보에 발표한 「국기(國旗)」, 「감격과 긴장」 등의 산문을 통해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 선동하고,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신보, 반도의 광 등에 발표한 「태평양송」, 「신일본권」, 「전시생활 수감(隨感)」 등의 산문을 통해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선전, 선동하였다.
김동인은 ○○○, ○○○와 함께 1939. 4. 15.부터 20여 일 동안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중국 화북지방에 다녀와 그 여정에 관한 감상을 좌담회에서 발표하였고, 1939. 7. 산문 「북지전선을 향하여」를 삼천리에 발표하였다. 또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매일신보, 국민문학 등에 발표한 「조선 문단과 내가 걸었던 길」, 「국민문학과 제재 - 전시의 국가와 작가」, 「총동원 태세로」, 「문화인의 총궐기」, 「전시생활수감(隨感)」 등의 산문과 1941년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에서 낭독한 시국적 작품 등을 통하여, 그리고 1941년 ‘내선작가 간담회’ 등을 통하여 문학인의 이른바 ‘문필보국’을 적극 주도하였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기간이 2009. 11. 30. 만료됨에 따라 피고가 이 사건 처분에 관계되는 권한을 승계하였다.

2. 본안 전 항변에 대한 판단

이 부분에 관하여 이 법원이 설시할 이유는 제1심판결 기재와 같으므로 행정소송법 제8조 제2항, 민사소송법 제420조 본문에 의하여 이를 그대로 인용한다.
3. 이 사건 처분의 적법 여부

가. 원고의 주장

원고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 구성이나 활동내용에 비추어 특정 이념에 치우친 경향을 보이고 광복 직후 반민특위 활동 당시보다 더 많은 인물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하는 등 그 결정내용을 신빙할 수 없다는 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 사건 처분의 근거로 삼은 소설 백마강에는 의자왕 대의 백제를 배경으로 일본인 남녀와 야마도 원군 등이 등장하나, 이는 소설적 장치에 불과하고, 김동인은 소설 전체를 통하여 반일의식, 독립의식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에도 소설의 일부 내용만을 근거로 반민특별법상 친일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부당하다는 점, 산문 ‘문화인의 총궐기’, ‘국기’, ‘태평양송’ 등은 그 내용 자체를 놓고 보면 황민화 운동이나 내선융화와는 무관하다는 점,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저항과 협력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글의 외면만 보고 반민특별법상의 요건인 주도성과 적극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점, 김동인이 3·1운동으로 체포된 적도 있고 천황불경죄로 복역하기도 하였으며 황군위문을 위하여 중국 화북지방을 다녀온 후에도 기억을 상실했다는 핑계로 글을 쓰지 않았다거나, 빈궁한 삶 속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원하지 않는 글을 쓰면서도 글 가운데 곳곳에서 그의 진의가 발견되며, 김동인의 전반적인 작품 내용을 보면 그의 민족주의적이고 예술지상주의적인 성향을 충분히 알 수 있고, 입체적 성격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켜 주제의식을 암시적으로 나타
내는 김동인 특유의 창작기법을 이해한다면 이 사건 처분의 근거가 된 소설·산문들의 문면을 들어 김동인이 황민화운동과 내선융화를 주도하였다고 할 수 없다는 점 등을 내세워, 이 사건 처분이 위법하다고 주장한다.

나. 관련법령

별지 관련법령 기재와 같다.

다. 친일반민족행위 해당 여부

1) 인정되는 사실관계

가) 김동인이 발표한 주요작품과 주요행적을 중심으로 그의 일생을 기재하면 다음 표와 같다.

1900. 10. 2. 평양 출생
1915.~1919. 3. 메이지학원 중학부 중퇴, 가와바타화숙 중퇴 후 귀국
1919. ‘창조’(1919. 2. 1.~1921. 5. 30.)창간, 단편 ‘약한 자의 슬픔’ 3·1운동과 관련하여 체포
1921. 소설 ‘배따라기’
1922. 소설 ‘태형’
1925. 소설 ‘감자’
1929. 소설 ‘광염소나타’
1930.-1931. 소설 ‘젊은 그들’
1932. 문인친목단체인 ‘조선문필가협회’의 발기인, 위원, 사업부 책임자.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 발표
1933.-1934.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약 40일 근무(1933년), 소설 ‘운현궁의 봄’
1935. 월간지 ‘야담’ 발간, 단편 ‘광화사’
1937.-1939. 소설 ‘연산군’
1938. 2. 4. 산문 ‘국기’(매일신보)
1939. 4. 15. ~1939. 5. 13. ‘황군’ 위문 문단사절로 화북지방 방문.
1939. 7. 좌담기록물 ‘문단사절 귀환보고-황군위문차 북지에 다녀와서’, 산문 ‘북지 전선을 향하여’ 발표
1939. 10. 29.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1941. 소설 ‘대수양’
1941. 11. 산문 ‘조선문단과 내가 걸었던 길’
1941. 12. 27. 산문 ‘국민문학과 제재-전시의 국가와 작가’
1942. 1. 6. 산문 ‘태평양송’ 발표
1942. 소설 ‘백마강’(1941. 7. 24.~1942. 1. 30.)
1942. 1. 23. 산문 ‘감격과 긴장’(매일신보)
1942. 2. 소설 ‘아부용’ (조광)
1942. 3. 산문 ‘신일본권’
1942. 7. 천황을 ‘그런 것’이라고 언급하여 천황불경죄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 선고.
1943. 조선문인보국회 소설희곡부회 상담역
1944. 성암의 길(8.-12. 조광)
1944. 1. 1.~1944. 1. 4. 산문 ‘총동원태세로’(매일신보)
1944. 1. 16.~1944. 1. 28. 산문 ‘반도민중의 황민화’(매일신보)
1944. 1. 20. 산문 ‘일장기 물결’ (매일신보)
1944. 12. 10. 산문 ‘문화인의 총궐기’ (매일신보)
1945. 3. 8. 산문 ‘전시생활소감’ (매일신보)
1948.~1949. 소설 ‘을지문덕’, ‘망국인기’
1951. 1. 5. 사망
1955. '사상계'에서 동인문학상 제정

나) 김동인은 이 사건 처분의 근거가 된 김동인의 산문과 소설을 비롯한 여러 행적과 그 글들의 주요내용을 연대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는 판독이 어려운 글씨이다, 이하 같다).

○「국기(國旗)」(1938. 2. 4 산문, 매일신보)
국기란 것은 국가의 이상, 역사 혹은 國體와 □□하는 것으로서 국가가 제정한 □旗이다.따라서 국기는 국가, 국민의 理想이요 정신이요 생명이 되는 者로서 온갖 경우에서 국가의 獨立不羈와 그 주권의 존재를 의미하는 者이다. 日章旗의 제정은 明治 초년이었다. 광명의 원천인 태양의 단순간결한 표시인 日章旗는 當年의 정치가의 敏腕에 발전하기보다 도리어 先進을 자랑하던 서양인의 우둔을 비웃어야 할 만치, 실로 국기로서 최우수한 者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중략) 국기란 것은, 멀리서라도 얼른 알아볼 수가 있고, 기억하기 쉽고 그리기 쉽고 그리고도 國體의 威儀를 넉넉히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서 日章旗는 가장 우수한 者이다.

○ 「文壇使節 歸還報告 - 皇軍慰問次 北支에 다녀와서」라는 좌담회 발언내용{좌담회는 김동인이 1939. 4. 15.부터 같은 해 5. 13.까지 황군(皇軍) 위문(慰問) 문단사절(文壇使節)로 중국 화북(華北)지방에 다녀 온 후 개최되었다, 1939. 7. 삼천리 제11권 제7호}이번 壯擧에 조선문단 及 출판계 諸氏가 많은 金員을 내어 주셨고 또 군 사령부와 총독부 경무국에서 여러 가지로 알선지도하여 주신 덕택으로 이제 우리들 일행 3인이 무사히 皇軍 위문의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의 후의를 다시 거듭 이 자리에서 감사합니다.

○ 煙草 1,000갑, 기야라 미루꾸(주:밀크캬라멜)와 초콜릿 각 1,000개씩 가지고 갔었고 또
거기 와서 과실과 과자 등도 전했어요.

○ 가고 오는 찻간에서 만나는 장병들도 우리의 임무를 듣고는 참으로 친절하게 하여 주더군요. 오히려 과실 같은 것도 갖다 주며 朝鮮이야기 □□이야기 물으면서도 대체로 순진하고 열정적이더군요. 前線 將士들은!

○「北支戰線을 향하여」(1939. 7. 삼천리 제11권 제7호)
조선문단에서 누구든 支那戰線에 파견하고 싶다. 파견해서 朝壇으로서 전선의 장병을 위
문하는 한편 朝鮮에도 전쟁문학을 일으켜 보자 하는 의견이 昨秋부터 있었다. 이러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만큼 때로는 말로도 발표해 보았다. 말이 발표되자 나와 동감의 의견을 가진 자가 의외로 많다. 아니 거진 전부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말로 발표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랬는데 문단과 불가분 관계를 가진 출판업자들 사이에도 같은 의견이 있어서 급속도로 문제는 구체화되어 출판업자들은 여비를 내고 문단에선 사람을 내어 문단과 출판업자와의 협력아래서 전선 관찰부대를 보게 되어서 무능한 나도 被파견인의 한 사람으로 된 것을 光榮으로 생각한다.
군사교육을 못 받고 군사문제에 전연 무지한 우리들은 부끄러운 일이나 이번 聖戰에 군사방
면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들이 받은 교양으로 군사행동에 그치지 말고 위대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도우려는 마음이다. 그러면 그 위대한 사업이란 무엇인가. 지금 새삼스럽게 설명하긴 쑥스러운 일이므로 그만두지만 요컨대 황갈색 피부를 가지고 키가 그리 크지 못한 인종인 大和民族 朝鮮民族 滿洲民族 及 支那民族은 대동단결을 하자. 전 세계가 한 뭉치가 되어 평화를 즐김은 가장 이상적일 바이겠으나 그것이 한 개의 이상론에 그치고 실현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바엔 적어도 同係의 민족만으로라도 평화를 보장하자. 異係 민족의 조종받는 인형 노릇은 그만 두자. 따라서 이상과 같은 의견에 반대하는 사상을 가진 자 혹은 단체가 있으면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와 同係 민족에 속할지라도 우리의 공동의 적이다. 적인 이상 당연 잔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것이 이번 聖戰의 本意요 참다운 목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聖戰은 군사행동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치공작이다. 정치공작을 수행하는 필요행동으로서 軍兵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위대한 황색민족의 대운동이 불행히도 朝鮮民衆에게 철저하게 알려 있지 않다. 지방
방방곡곡에까지 배포되는 신문에도 ‘어딜 점령했다.’, ‘적군을 全滅했다.’쯤으로 자세한 것은 보고하지 않는다. 근근 도회지식인이 東京쪽에서 오는 잡지로 그 모습을 상상할 정도다. 국어를 모르는 자(도회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와 內地 발행 잡지 판매소가 없는 데 사는 사람은 이번 聖戰의 참 의의와 聖戰을 수행하기 위해서의 병사들의 노고를 전연 모른다. 이것을 朝鮮民衆에게 보고하고 그 蒙을 깨닫게 할 중대한 사명과 의무가 우리들 朝鮮文士의 어깨에 지워져 있다. 생각하면 이렇게 큰 임무를 질 만한 자신이 없는 나다. 너무 즐겁고 光榮스런 임무이길래 사퇴하지 않고 받았으나 출발일자가 닥쳐오매 가속도로 임무의 중대함을 느낀다. 괴로운 중에서도 단 하나의 기쁨은 오래지 않아 전장에 가서 지금까지 文面으로만 알았던 장병의 노고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무능자요, 또 눈뜬장님이다. 내가 이제 가서 보아서 보고할 글은 支那에서 전개될 사건의 백분지일도 전지 못하리라. 하나 현황의 만분지일도 못 되는 나의 보고문으로도 朝鮮의 지방인이 이번 聖戰에 대해서 가졌던 관념(그것은 극히 빈약하다)을 백배 더하게 하리라는 장담은 할 수 있다. ─ 그만큼 朝鮮의 지방인은 이번 聖戰에 관하여 무지했다. 군 당국에서나 總督府 당국에서 이번 이 일을 극력 후원해 준 것은 이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결과가 기대보다 적다 치더라도 그것은 우리들의 무능한 탓이지 결코 성의가 부족해서가 아닐 것이다 ─ 라는 말씀만은 믿어 달라는 것이다.

○ 소설 「백마강」 연재 소개 기사
1941. 6. 29.자 조간 4면--사변(日支事變, 즉 중일전쟁 - 작성자) 이후 국가가 문단을 향하여 시국소설을 요망할 때에 작가들은 異口同言으로 문학은 항상 정치적인 현실보다는 뒤떨어진다는 것, 생생한 현실이 시간에 □過되어 문학주제로서 무르익을 시기를 기다리련다는 것을 대답하였다. 그 답변에 일리가 있었다면 이제 사변이 일어난 지 어언 만 4년이 되려는 이때 작가들도 비로소 붓을 들어 모든 시국적인 제재를 취하여 본격적으로 시국소설을 쓸만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이런 사정에 託하여 본사에서는 다음에 싣는 장편소설을 시국소설로 택하기 위하여 이번 우리 문단의 중진인 金東仁 씨와 화백 ○○○ 씨를 부여에 특파하여 백제
말기를 무대로 한 본격적인 시국소설에 착수케 되었다. 부여는 독자 제현이 숙지하시다시피
금일 內鮮一體의 □□이요 지금부터 1천3백 년 전 백제 융성 당시에 내선교류의 문화가 난만
하게 꽃피었던 聖地임에 파견된 양 씨는 지금 이 성지 부근의 각지를 歷訪하면서 제재와 사실고증에 치밀한 조사를 하는 중이다. 이 왕조 말기의 극적인 사실을 엮어서 3천의 궁녀가 낙화와 같이 떨어진 □□한 哀話 위에 高峰을 이루는 이 장편소설은 독자 앞에 華麗□□한 □□卷을 전개할 것이다.
1941. 7. 8.자 조간 3면-- 작자 김동인 씨는 일찍이 文筆報國의 일념에서 제1선에까지
황군장병을 위문 갔다가 불행히도 건강을 해치고 돌아온 후 요양에 전심한 지 이에 2년여 한
편 筆硯을 새로이 하고 구상을 가다듬어 內鮮一體의 聖地 百濟를 배경으로 신체제에 즉응하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 눈물겨운 고심을 거듭하여 온 터이다. 그리하여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의 제1작을 본지에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작자는 이 백제 말년의 비극에서 처음으로 불타는 정열과 詩魂의 약동을 느꼈다 한다. 기대해도 남음이 있을 것을 독자와 더불어 굳게 믿는 바이다.

○「新連載夕刊小說 - 白馬江(金東仁 作 ○○○ 畵) 작자의 말」(1941. 7. 8. 매일신보)
7백년의 길고긴 왕조를 누려 오다가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전멸된 ‘백제’
─. 그 찬란한 문화는 바다를 건너 야마토[大和]에까지 미쳐서 야마토로 하여금 오늘날의 대일본제국을 이룩하는 초석이 되었다. 오늘날 같은 천황의 아래서 ‘대동아’ 건설의 위대한 마치를 두르는 반도인의 祖先의 한 갈래인 백제 사람과 내지인의 祖先인 야마토 사람은 그 다음년(지금부터 1천3~4백 년 전)에도 서로 가깝게 지내기를 같은 나라나 일반이었다.
이 백제가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의 공격에 7백년 역사의 종언을 고하였다. 그
러고 백제의 3천 궁녀는 大王浦 ─ 지금의 낙화암 ─ 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이 소설에서
는 바야흐로 쓰러지려는 국가를 어떻게든 붙들어 보려는 몇몇의 백제 충혼과 및 딴 나라일망정 서로 친근히 사귀던 나라의 危局에 동정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협력한 몇몇의 야마토 사람의 아름답고도 감격한 행위를 줄거리로 하고 비련에 우는 백제와 야마토의 소녀를 配하여한 이야기를 꾸며보려는 것이다. 내용에 대해서는 미리 여러 말을 하고자 안 한다.

○ 「조선 문단과 내가 걸었던 길」(1941. 11. 국민문학 창간호)
日支事變은 돌발하여 每日 新聞과 라디오는 전황을 알린다. 그해 겨울, 잠 못 드는 긴
밤을 신경통으로 고생하면서, 지금도 戰場에서는 얼마만큼의 사람이 어떤 고통을 맛보고 있는것일까 하면서, 나의 고통에 미루어 남의 고통을 걱정스러워 하며, 그중에서도 패전국의 무고한 민중들이 집과 재산을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울며 유랑하리라는 것이 病的으로 약해진 내게 몹시 느껴져, 다른 이의 고통 때문에 나는 한층 괴로워하였다. 그와 동시에 느낀 것이 우리의 행복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을 하면서 그들은 고생하는데 우리는 안락하게 마치 타인의 일인 듯이 觀戰을 할 수 있는 것은 어쩐 일일까? 자유롭다지만 지금까지 나는 국가에 대해 하등 감사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는 자유주의의 인간이었다. 이번 事變에서 마찬가지로 전쟁을 하면서 그들은 고생하는데 우리는 안락하게 觀戰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체험하면서 비로소 국가에 대해 謝恩하는 생각과 軍에 대해 謝恩하는 생각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싸움은 그 다음해로 이어져 만 1周年이나 지나면서 장기전화 함과 동시에 사회 각 방면에서는 애국운동이 점점 격화하는 상태였다. 漢口가 함락되고 廣東도 우리 손에 들어왔으나 전쟁은 언제 끝날는지 끝도 없었고, 이렇게 되자 애국운동은 더욱더 커져나갔다.
그러나 내게 쓰라렸던 일은, 내 자신이 병상에 몸져누워 있는 것은 부득이하다 해도, 조선
문단이 어떤 단체적 운동도 않고, 타인의 일인 듯이 머물고 있는 사실이었다. 병상에 몸져누워 움직이지 못하던 나는 혼자 고민하였던 것이다. 전쟁에 접어든 지 3년째에 내 병세가 조금 나아지게 되었다. 아직 걸을 수는 없다 해도 점점 나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였다. 나는 아직 보행을 할 수 없는 몸을 택시에 싣고 文藝를 감독하는 당국의 某氏를 만나, 만약 당국에서 軍의 양해를 얻어 준다면 문단에서 황군 위문을 하고 싶다고 신청하였다. 그랬더니 모씨는 ‘軍에서 귀찮게 여겨 그것은 관두고, 그 대신에 文士의 本業과 닮은 ‘종이연극’이라도 만들면 어떤가?’라고 권하여, 그것은 내 쪽에서 거절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조금씩 뭉쳐지게 된 문단에서도 드디어 움직임이 있었다. 모든 국민이 일제히 나라
와 軍에 감사할 때 각각이 개인주의자인 文士들도 스스로 단결하여 北支慰問使를 파견하자는 논의가 일어, ○○○와 ○○○와 ○○○의 세 잡지사가 주동하여 구체적으로 위문사 파견件이 표면화되었다. 그 위문사의 한명으로 선택된 바였다. 나는 겨우 병상에서 일어나게 되었으나, 도저히 여행은 감내할 수가 없어, 감사를 드리며 불가능하다는 뜻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가라는 명령을 받아, 자신 없는 채 北支로 여행을 갔다. 北支에서 드디어 몸져누웠다. 간신히 병상에서 일어나 아직 달걀처럼 껍질이 없으면 안 되는 몸으로 무리하게 여행을 하여 병이 재발하였던 것이다. 병세는 심각하여 한 때는 文字까지도 잊어먹어, ‘病이 重하다.’는 전보문도 스스로는 생각을 해 낼 수 없어 다른 이에게 부탁하여 써 받을 정도로 심하였으며, 죽을것을 통보받았던 일도 있어, 재기불능이라고 스스로도 단념하였지만, 날이 감에 따라 조금씩 회복은 되어 갔지만 예전과 같이 명쾌한 두뇌로 되돌아가기에는 나이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의뢰받은 지면이 다해가기에 아직 쓰고 싶은 일은 나중 기회로 돌리겠으나, (중략) 지금 古今 미증유의 國難을 맞아 帝國은 여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위업에 매진하는 이때에 국민으로서 우리가 짊어질 의무는 크다. 그중에서도 아마도 宣傳力을 지니는 ‘문학’이 맡아야 할 역할은 매우 중차대하다. 國民文學이 소리 높여 부르짖어지는 까닭인 것이다. 나는 이 ‘이데올로기’로서의 국민문학에서 오히려 감정으로서의 애국열과 보국정신을 붓의 힘을 빌어서 국민에게 환기시켜, 천황폐하의 은혜와 나라의 은혜에 대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것이다. 여생을 御奉公으로서 말이다. 쓰고 싶은 일은 많고, 시간과 원고 매수는 부족하여 자연 순서도 결말도 없이 글을 썼다. 양해를 바란다.

○ 매일신보 기사(1941. 11. 15. 조선문인협회 주최 내선(內鮮) 작가 간담회)
시국이 급박해짐을 따라서 조선의 문단인도 최근에 와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각처
에서 국민문학의 건설이 부르짖어지는 이때를 당하여 조선문인협회에서는 이 문단 동향에 더 한층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어제 15일 오후 5시 반부터 시내 雅叙園에서 국민문학의 건설에 대한 정당한 방향과 구체적인 방법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간담을 교환하여 금후 활동에 대한 커다란 수확을 거두었다. 이날 출석자는 문인협회 상임간사 측으로서 ○○○, ○○○○, ○○○, ○○○, ○○○, ○○, ○○ 씨 등이 출석하고 작가 측으로서 金東仁, ○○○, ○○○, ○○○, ○○○, ○○○, ○○○, ○○○, ○○○ 씨 등 十數 인의 참석을 얻었는데 이번 회합은 근래에 없는 내선문단의 회합으로서 금후는 기회 있는 때마다 문협의 알선으로서 이런 간담회가 가끔 열리게 되리라고 한다.

○ 「국민문학과 제재 - 戰時의 국가와 작가」(1941. 12. 27. 매일신보)
문학이라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지는 바의 선전력을 국민계몽의 편으로 돌려서 국민
으로 하여금 현하 시국을 이해케 하며 나아가서는 시국에 適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것이 시국하의 문학이 가져야 할 임무인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문학을 제작하기 위해서의 제재는 물론 부지기수다. 그런 가운데서 그날 議題가 되었던 중요한 하나는 ‘조선사회에는 부분을 除하고 군인생활이 없다. 현재 전쟁 중에 있고 또한 전쟁의 처리로서 신질서를 세우려는 소설 제재 중 군인생활이라는 것을 제외하자면 매우 窮窟하다.’는문제가 나왔다.
이것을 다시 해설하자면 ‘현하의 우리나라는 도시에서 벽촌까지 전쟁의 영향이 안 미친 데가
없다. 전쟁이라 하는 것과 군사행동이라 하는 것은 거대한 현실이다. 그러나 전쟁에 직접 관여치 못하는 조선사회에서는 소설상의 인물로 하여금 當者는 현역 군인이요 友人은 제대 군인, 누이는 전사자의 미망인, 처남은 軍用達商人 등등이라 하는 사회를 제재 삼을 수가 없다. 현하 시국에서 평화인만을 골라서 등장시키는 소설을 제재로 하여야겠으니 그 범위가 국한되어 매우 답답하다. 제재에 국한이 있다 하는 것은 그다지 큰 국한이 아니라도 답답한데 현하 사회의 대부분을 형성하는 ‘전쟁하는 사람’을 뽑자니 이것은 막대한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하는 것이었다.

○ 시국작품 낭독 관련기사{경성일보 1941. 12. 18.자)
앞서 경성 府民館에서 결전문화대강연회를 열어 총후 국민문학 건설에 매진하였던 조선
문인협회에서는, 이번에 다시 경성 중앙방송국 제2방송부와 제휴, 각 작가로 하여금 시국적
작품을 스스로 마이크 앞에서 조선어로 낭독하게 해, 전 조선 민중에게 호소하게 되었는데 그 작가는 다음 각 氏이다. ○○○○, ○○○, 金東仁, ○○○, ○○○, ○○○, ○○, ○○○, ○○○, ○○○, ○○○, ○○○.

○「太平洋頌」(1942. 1. 6. 매일신보)
이러한 寶洋을 ‘내 것이라.’고 큰 소리로 외칠 권한을 가진 인종은 누구나 일곱 바다의
주인이라 자칭하고 유니온 잭의 旗下에 해가 지는 일이 없다고 자랑한 대영제국도 아직 감히‘태평양 내 바다’라고 고함쳐 보지 못하였다. 그 몸의 半身과 및 수다한 頒島를 태평양에 잠그고 있는 미합중국도 감히 이 소리를 외쳐 보지 못했다. 그 밖의 다른 작은 나라들은 거듭 말할 것도 없다. ‘태평양은 내 바다다.’ 인류에게 향하여 큰 소리로 능히 이렇게 부르짖고 이 권리를 주장할 지위와 실력을 가진 자는 오직 우리 日本밖에는 없다. 태평양의 所在가 동양이고 서양이고를 막론하고 태평양상의 영토가 英人의 것이고 蘭人의 것이고를 막론하고 모두 이를 품에 품은 巨廣한 태평양은 日本의 것이로다. 여기 반대할 자 누구며 항의할 자 누구랴

○ 감격과 긴장」(1942. 1. 23. 매일신보)
우리들 문단인이 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內鮮一體로 국민의식을 높여 가게 된 것은
만주사변 이후다. 만주사변은 ‘만주국’이 탄생하고 만주국 성립의 감정이 지나사변으로 부화되자 조선에선 ‘內鮮一體’의 부르짖음이 높이 울리고 내선일체의 대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다시 대동아전이 발발되자 인제는 ‘내선일체’도 문젯거리가 안 되었다. 지금은 다만 ‘일본시민’일 따름이다. 한 天皇陛下의 아래서 生死를 같이하고 榮枯를 함께할 한 백성일 뿐이다. ‘내지’와 ‘조선’의 구별적 존재를 허락지 않는 한민족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종족을 캐자면 다를지 모르나 지금은 합체된 단일민족이다. 이러한 심경에서 출발한 현재의 생활은 ‘엄숙’의 단 두자로 끝날 것이다. 나는 지금 구직운동을 한다. 40여 세에 이른 오늘날까지 단 40일간밖에는 봉급생활을 못 해오던 내가 지금 진정으로 구직운동을 한다. 이것은 ‘國民皆勞主義’라는 뜻에서가 아니다(보잘것없는 미약한 것이지만). 나의 가지고 있는 재능을 다 들어 국가에 바치려는 진심에서다. 보잘것없는 초라한 것이나마 熱과 誠으로 국가에 바쳐 만분의 일이나마 國恩에 보답하려는 것이다. 국가가 命하는 일은 다 못 하나마 국가가 ‘하지 말라’는 일은 양심적으로 피하련다. 국가가 ‘좋다’고 인정하는 일은 내 힘 자라는 데까지 하련다. 이미 자란 아이들은 할 수 없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에게는 ‘日本과 朝鮮’의 별개 존재라는 것을 애당초부터 모르게 하련다. 大東亞戰이야말로 인류역사재건의 聖戰인 동시에 나의 심경을 가장 엄숙하게 긴장되게 하였다.

○ 「新日本圈」(1942. 3.경 ‘半島の光’ 제52호)
‘新日本圈’이라는 말과 ‘大東亞共榮圈’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인류의 심령적 양식인
佛, 儒의 산출자는 이 圈內의 인종이다. 지나간 날의 인류의 찬란한 문화를 생산한 자는 모두
이 권내의 인종이다. 그러나 우리의 祖先은 후손들을 위하여 그 지하자원은 곱다랗게 남겨 두었었다. 그랬는데 불행히 他圈內의 인종들이 이 권내로 침입하여 우리의 祖先이 후손들을 위하여 남겨두었던 것을 캐어가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이를 보전하기 위하여 敢然히 일어선 帝國은 寶刀를 높이들어 이 침입자를 쳐 물리는 聖戰을 시작하였다. 이 성전의 결과로 생겨날 대동아공영권 ─ 즉 新日本圈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옛말에서나 듣던 바와 같은 龍宮 같고 仙園 같은 찬란한 大地域일 것이다. 무진장의 수산물, 광산물, 식물의 위에 燦然한 일본의 문화를 加한 마치 태양과 같이 빛나고 무지개와 같이 찬란한 新日本圈의 문물은 지금 바야흐로 전개되려 한다. 이 빛나는 역할의 한몫을 맡은 우리의 자랑도 소리 높여 부르짖자.

○ 「총동원 태세로」(1944. 1. 1. 및 같은 달 4.)
대동아전쟁도 압도적 승리의 2년간을 보내고 제3년을 맞이한다. 지나사변의 막이 열린
지 벌써 7년. 잘못하면 鈍化하고 惰性化하기 쉬운 우리의 熱과 誠을 잔뜩 북돋워 처음의 그
긴장 처음의 그 열성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할 필요가 크다.
애국심이며 報國心 등등은 일면 인간의 본능인 동시에 또 일면으로는 인간의 사명(의무감의
생산물)이다. 국가 無事時에는 희박한 본능적 존재로 남아 있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강렬한 본능적 감정(애국심)에 겸하여 의무적 감정까지 겸한다. 인간 감정의 표현체인 ‘문학’도 평상시에는 문학 본래의 사명인 ‘위안물’, ‘오락물’인 노리개적 존재를 지켜 오다가 비상시에는 홀연하여 그의 가지고 있는 바의 ‘교화력’, ‘선전력’, ‘선동력’ 등을 있는 대로 발휘하여 국가목적 선양에 全 職能을 바친다. 문학 자신이 역사적이요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던 감화력을 교화력으로 고치고, 위안력을 선동력으로 고쳐 가지고 국가명령 아래서 국책적 역할을 다한다.
전쟁에 대한 국민의 熱과 긴장이 잘못하면 풀려지기 쉬운 이때에 있어서 그 풀리려는 긴장
에 다시 새로운 기름을 쳐 주어서 다시 감동과 흥분을 환기케 하고 ─ 이리 하여서 국민의 마
음에 언제까지든 頑蒙을 격멸한다는 각오와 아울러서 그들에게 다시 소년과 같은 정열을 부어넣어 줄 자는 오직 문학의 선동력뿐이다. 청신한 감동과 거기 따르는 애국적 정열을 제공할자는 ─ 제공하여서 銃後人의 誠을 그냥 유지케 할 자는 오직 문학의 선동력뿐이다. 몇 대의 항공기, 몇 척의 함정을 前線으로 내보내는 데에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할 자는 문학이다.
지원병에서 징병으로 또는 특별지원병으로 우리 반도인도 황민화의 보조가 더욱 힘차고 더
욱 열 있게 행진할 때에 이 모든 행사가 일시 雷動的 흥분이 아니고 진정한 황민화의 高揚인
점을 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후계자의 陸續을 효과 있게 부르기에는 문학의 선동력과 흥분력의 힘을 빌 필요가 많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 반도의 문학인의 책무는 크고 또 중하다. 막대한 물자와 기계력을 총동원하여 가지고 우리에게 대항하려는 저 米英을 상대로 하여 그를 꺼꾸러트리고 재기 불능케 하기 위해서는 1억 국민의 4半分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반도인의 지위는 가볍게 볼 수 없는 바이다. 이 절대적인 수효인 반도인의 사상을 지배할 책무를 지고 있는 우리 문학인의 지위는 스스로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이다. 국가성쇠의 열쇠가 우리 반도 문학인의 손에 달렸다 해도 과한 망언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내 손으로 총을 잡지 못하고 대포를 잡지 못하였다고 退縮지 말고 이 전쟁을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열쇠를 잡았노라는 자각과 긍지 아래서 우리의 무기인 문필을 가장 효과 있게 이용할 것이다.

○ 「반도민중의 황민화 - 징병제 실시 隨感」(1944. 1. 16.부터 같은 달 28.까지 매일신보 10회 연재)
조선에도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우리나라 헌법은 병역을 국민의 의무로 잡았다. 우리 조선의 예로 볼지라도 明治大帝의 御詔로서 韓國倂合의 뒤에 조선인의 지위를 내지인과 동일하게 해주신다는 고마우신 분부를 받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역에서만은 조선인은 제외되었다. 즉 병역이란 자는 단지 국민의 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특권인 증좌이다.
조선인의 사상이 과연 황국신민 되기에 충분한가, 我國의 국방군은 그 사상까지 완전한 일본인적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면 안 된다.
한동안의 기간을 지낸 뒤에 우선 지원병제도를 조선에 실시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황민화의
성과 정도를 보고, 이만했으면 조선인도 황민화 하였다는 판단을 얻어 가지고, 그러고야 조선인에게도 전면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중략) 조선인도 황국신민이 된 지 30여 년 ─ 이제야 이 특권을 획득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國體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이런 국체를 가진 국가의 우수한 병사가
되기를 명하는 바이다. 내 몸은 이제부터는 내 것이 아니요 또는 가족의 것도 아니요 황공합
게도 폐하의 것이며, 지금 폐하의 御吩咐로 頑敵을 멸하려는 聖劍을 잡고 일어선 바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나서야 할 것이다.
드디어 조선인에게도 병역의무를 주게 되었다. 이것은 국가에서 부르는 것이니 이것으로는
조선인의 황민화의 정도를 測할 수 없지만, 징병령 실시와 함께 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되었다. 이것은 즉 대학·전문학교의 재학생으로서 병역연령이 초과되기 때문에 병역에서 면제된 자에 한하여 육군간부후보생으로 특별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선인의 황민화의 정도, 조선인의 일본인적 애국심의 强度를 다루어보는 저울이었다. 강제징집이 아니고 自由裁斷하의 지원이었다. 병역이 싫거든 지원을 안 하건 이 자유선택할 수 있는 기로 앞에서 사회진출을 버리고 병역을 지원한다 하면 이는 순전히 그의 일본인적 애국심(자아를 몰각한)의 산물이라밖에는 인정할 도리가 없다.
그만치 엄하였던 해군에서까지 문을 열고 조선인을 부른다. 즉 조선인도 황민의 완전한 자
격을 구비하였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 전폭적인 신뢰에 어긋남이 없도록 처신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인의 과거의 국가생활은 너무도 기형적이었다. 淸이라 明이라 하는 이중의 군주를 모시고, 그 아래서 기형적인 국가생활을 경영하여 왔다. 지금 그런 기형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서 一天萬乘의 大君主 한 분을 위에 모시고, 정상적인 국가생활을 경영하려 함에 있어서, 역시 ‘황민으로서의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본인’이라는 미흡을 안 느낄 수가 없던 바, 지금은 그 미흡에서까지 완전히 해방되어, 이제는 티 없는 황민이라는 점을 자타가 함께 인정하게 되었다. 지금 국가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사람’이 필요하다. 지나대륙에 또는 저 남방에 직접 전투원과 전쟁보조자를 얼마를 가질지라도 넉넉하다고 할 수 없을 만한 대전쟁을 수행하는 중이다. 이 직접 전쟁에 필요한 인원도 무제한으로 필요한 동시에 또한 총후인도 얼마이고 쓸데 있다. 군수공업 종사원으로 또는 식량증산원으로 …… 현재의 1억이라 하는 수효를 2억, 3억으로 늘려도 결코 넉넉하다든가 과하다든가 할 수 없으리만치 무한한 人數가 필요하다. 그 인원은 황민이 아닐지라도 무관할 듯 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일본정신 파악자라야 자기 책무에 대하여 진실한 성의로서 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기도 진정한 황민이 필요하다. 7천여 만밖에 못 되던 황민이 이젠 1억으로 증원된 현재 우리에게 무서운 것이 무엇이랴. 세계는 우리 앞에 굴복할 것이요, 우리의 거룩한 대목적은 不日 실현될 것이다

○ 「日章旗 물결 -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1944. 1. 20. 산문)
학병 ─ 학병을 보내는 사람.
붓을 잡던 손에 붓 대신 칼을 잡고 부르심에 응하여 용감히 정의의 대로로 나아가려는 ‘우리
의 젊은 용사’는 여기서 인간 정애의 마지막 겨레를 벗어던지고 오직 ‘황군’이라는 단일한 칭
호 아래서 나라님 발 앞에 몸을 내어던지는 ‘新’과 ‘舊’의 생활의 갈래길의 그 분기점이다.
전쟁을 겪고 있는 도회답게 강렬한 광선은 차단하여 약간 어둠침침한 정거장에 여기 한 패
거리 저기 한 패거리 30~40명씩 뭉쳐 서 있는 이 군중들 ─ 손에는 한결 같이 일장기의 표식
으로 들고 흥분된 얼굴과 긴장된 태도로 ─ 아아, 이 무리의 중심이 되어 있는 한 씩씩한 젊
은이, 이가 오늘의 주인공이요 기쁨의 작별, 환희의 작별을 하고 받으며 御馬前에 六尺身을 바치려 나가는 우리의 용사다. 침침한 가운데서도 뚜렷이 보이고 저어지고 흔들려지는 거룩한표식인 ‘히노마루’ ─ 히노마루 두르며 외치는 만세성은 세상이 떠나갈 듯‘천황폐하 만세’
‘대일본제국 만세’‘학병 만세’‘××전문학교 만세’일장기의 물결과 만세의 우레 가운데서 떠나는 젊은이. 그의 어깨에는 2천5백만의 신뢰와 기대가 지워져 있는 것이다. 이만 것은 넉넉히 감당할 만한 넓고 튼튼한 어깨로서.

○ 「문화인의 총궐기」(1944. 12. 10. 및 같은 달 11.)
전쟁에 있어서 문화인은 직접 총을 잡을 줄 모르고 마치를 두를 줄 모르지만 총을 만들
어 군인에게 제공하고 마치를 만들어 工人에게 제공하고 軍民의 사기를 진흥케 하고 ─ 나아가서는 국민에게 필승의 신념을 부어주는 것은 모두 역시 문화인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다.
직접 총을 잡지 못하고 직접 마치를 두르지 못한다고 스스로 겸손치 말고 우리는 우리 문화인이 인류사회에 가지는 무형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자각하고 오늘날의 우리의 전쟁을 이기기 위하여 우리의 힘의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아야 할 것이다. 宣傳에 指導에 사상진흥에 적개심 興起에. 대동아전쟁도 벌써 제4년을 맞이하는 오늘 국민사상을 꽉 붙들고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인의 奮起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 「戰時生活 隨感」(1945. 3. 8부터 같은 달 11.까지 매일신보, 2편의 주요내용)
온갖 곳에 明朗敢鬪라는 비라(びら, 傳單)며 物産獎勵라는 비라가 붙어 있다. 현하 苛烈
한 시국하에서 우리의 戰力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증산’이 절대로 필요한 것과 同程度로 우리의 기분을 명랑케 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의 기분을 명랑케 하기 위해서는 물자의 배급을 자주 하여 주었으면 가장 첩경일 것이다. 그러나 배급도 너무 가지면 역시 긴장味와 희열감이 적어지고 평범화하여 버릴 것이다. 여기 비로소 예술의 필요성이 두드러져 오르는 것이다. 무슨 위안의 연극, 무슨 위안의 음악 등 통속예술이 등장을 하여 苛烈한 시국의 중압에 허덕이는 국민에게 마음의 ‘ユトリ(여유)’를 생기게 하여 주는 것이다. 농업이며 산업의 전사들이 피곤한 몸을 安臥할 생각도 아니하고, 이런 위안회에 다투어 출석하고, 거기서 도리어 一夜를 安眠보다도 더욱 원기를 회복하여 가지고 이튿날의 노무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노무가 극심하면 극심할수록 그 위안도 정비례하여 커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意味下에서, 노무가 戰力인 동시에 그 위안도 또한 戰力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을 戰力化해야 할 현 시기에 있어서, 예술이 직접 무기 아니니 등한시해도 좋다는 일부 그릇된 □□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여기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예술도 전력이다.

다) 일제 치하 1938년 이후의 시대상황을 보면, 1937. 7. 7.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941. 12. 7.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당시는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징발뿐 아니라 조선인의 파병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을 일본군대 내에 배속시켜 군대 운용을 할 목적으로 조선인이 더 이상
외지인이나 식민지인이 아니라 일본제국의 국민으로서 천황의 동일한 신민이라는 생각
을 심어 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추진된 정책이 황민화정책과 동조동원
론(同祖同源論)을 내세운 내선일체, 내세융화정책이었다. 제7대 조선총독(1936. 8. 5. ~
1942. 5. 28.)이었던 육군대장 출신의 미나미지로는 이러한 정책을 가혹하게 수행하면
서 황국신민서사를 제정하여 모든 집회에서 이를 암송하게 하는 등 황국신민화 운동을
진행하였다. 또 일본어 상용을 의무화한 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말살정책을 폈으며,
개정조선민사령을 공포하여 창씨개명을 강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하 지식인들
의 통제를 위하여 수양동우회 사건1)을 조작하였고, 이후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
서는 모습을 보였다.

2) 판단

가) 주도성(主導性)의 판단기준

이 사건 처분의 근거가 된 반민특별법 제2조 제11, 13호는 모두 주도성을 요건으로 한다. 주도성(主導性)은 주장(主張)이 되어 이끈다는 의미로 단순한 협력을 넘어서는 개념으로서 이는 반민특별법상 친일반민족행위 여부가 문제되는 행위의 내용뿐 아니라 행위자의 지위, 그 행위의 의도나 횟수, 그 당시 보여 준 다른 행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고, 제13호의 ‘적극성’은 주도성과 별개의 독립적 개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문인들의 경우, 그 행위의 결과물인 글이 남아 있는 탓에 다른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비교하여 실제 친일행위의 정도나 그 영향력이 크지 아니함에도 주도성 판단에서 과대평가될 우려가 있으므로 그 인정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그 문인의 지위나 영향력, 글을 쓴 의도나 그 횟수, 활동내역 등을 기준으로 보다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

나) 김동인의 주도성 인정 여부에 관한 판단기준

김동인은 최초의 문예지 ‘창조’를 직접 발간하고 근대 한국소설을 대표할 만한 단편소설 배따라기, 붉은 산 등을 발표하였고 이는 당대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동인은 일제 말기의 조선어말살정책에도 지속적인 우리말 글쓰기를 통하여 국어의 현대화에 기여하였고, 또 그가 문어체적 표현을 지양하고 구어체 표현을 활용한 글쓰기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업적도 높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 김동인은 앞서와 같은 그의 소설가적 역량뿐 아니라 최초의 문예지를 발간한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문단에서의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았고, 김동인 스스로도 이와 같은 자신의 역할과 지위에 관하여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만큼 이를 잘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앞서 인정사실에서 본 바와 같이 중·일전쟁 이후 수양동우회 사건을 겪은 1938년 이후에는 과거와 달리 매우 직접적이고 선동적인 친일적인 내용의 산문을 계속적으로 발표하였고, 조선문인보국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에 관여하면
서 일제에 의존하였으며, 심지어 황군위문의 명목으로 중국 방문을 자원하기도 하였다.
원고는, 그의 내심은 글의 내용과 달랐고 당시의 시대상황 탓에 그와 같은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하나, 김동인과 같은 문인이 자신이 쓴 글이 사실은 자신의 내심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이자 자기부인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고, 오히려 그의 글의 내용이나 그 빈도 등에 비추어 보면, 중·일전쟁 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지식인들의 움직임처럼 김동인도 조선의 독립이 아닌 일본제국 내에서의 조선인의 지위향상을 목적으로 일제에 적극 협력하는 쪽에 동조한 점이 엿보인다 하겠다.

따라서 김동인이 당시 내심에 품었던 진정한 의사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또 그 당시 시행된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히 교활하고 가혹하였다고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그가 발표한 글의 내용이나 그 글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표시된 의도 등을 중심으로 반민특별법상의 주도성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다) 반민특별법 제2조 제11호 해당 여부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반도민중의 황민화 - 징병제 실시 수감(隨感)」, 「일장기 물결 -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의 내용은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매우 직접적이고 자극적으로 선전·선동하고 있고, 그 횟수도 신문에 11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던 점, 더구나 그 글이 당시 유일한 한글신문이었던 매일신보에 실렸던 점 등을 종합해 보면, 반민특별법상의 주도성을 가졌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 처분 중 반민특별법 제2조 제11호 관련 부분은 적법하다.

라) 반민특별법 제2조 제13호 해당 여부

(1)「소설 백마강」에 관하여

소설 백마강의 내용은 백제 말기 의자왕 대의 패역한 정치와 이를 근심하는 충신들의 고뇌를 둘러싼 이야기를 주로 하여, 백제 일본부의 일본인 소가와 백제의 종실 복신의 딸 봉니수, 백제에 유학온 일본인 처녀 오리메의 사랑이야기와 삼국시대 말기의 백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연민,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와 백제부흥운동에 대한 일본의 원조 등의 내용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현대에 이르러 소설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를 내선일체나 황민화운동과 큰 연관을 짓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이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문학양식으로서, 독자들이 이를 허구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허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동요를 배제하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문학의 속성이기도 하므로 당대의 독자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매일신보는 소설 백마강이 중·일전쟁 발발 4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시국소설로 백제를 내선일체의 성지로 표현함으로써 소설의 연재의도를 분명히 하였고, 김동인 역시 이에 호응하여 반도인과 내지인이 대일본제국의 천황 아래에서 대동아건설을 해 나가기 전에도 백제와 일본이 한 나라 사람과 같았다고 하면서 소설의 집필의도를 밝혔다. 백마강의 내용도 의자왕이 패역함을 보이고 정치를 게을리하여 일본과의 교류가 소원해졌다가, 그 후 일본의 사신과 일본에 갔던 풍왕자가 백제로 돌아올 무렵 의자왕이 정신을 차리고 옛모습을 회복하는 장면, 의자왕이 일본인 소가를 멀리하면서 다시 백제의 위기가 찾아오고 소가가 백제인에게 일본인의 충성심을 가르치겠다는 뜻을 설파하는 장면, 부여성이 나·당연합군에 포위되자 백제인들이 아닌 소가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의자왕과 태자를 구출하는 장면, 종실집기의 백제부흥운동을 돕기 위하여 종실복신과 일본원군이 배를 타고 등장하는 장면에서 일본원군이 당대의 위기를 극복할 영웅처럼 묘사된 점 등이 나타나고, 구체적 표현에 있어서 일본을 ‘야마도(大和)’로 지칭한 것은 일제가 황민화운동의 기치로 내세운 대화(大和)·대애(大愛)정신과 관련있다고 할 것이
다.
이와 같은 소설 고유의 성격과 백마강의 집필의도, 그 내용과 표현 등에 의하면 당대의 독자들은 백마강을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닌 황민화와 내선융화를 목적으로 한 글로 읽었음이 분명하고, 당시의 유일한 한글 일간지였던 매일신보에 이와 같은 소설을 6개월여의 기간 동안 연재한 것은 김동인에게 반민특별법상의 주도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2) 「국기(國旗)」, 「북지전선을 향하여」, 「조선 문단과 내가 걸었던 길」, 「태평양송」, 「감격과 긴장」, 「신일본권」, 「총동원 태세로」에 관하여

위 산문들은 그 내용이 조선인을 일제의 한 지역인 반도인임을 전제로 동일한 천황을 섬기는 같은 황국신민임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그 내용이 직접적이고 선동적인 점, 이와 같은 글들을 지속적으로 계속하여 일간지나 잡지 등을 통하여 발표하였던 점 등에 의하면, 위 산문등을 발표한 행위는 김동인에게 반민특별법상의 주도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3) 「국민문학과 제재 - 전시의 국가와 작가」, 「문화인의 총궐기」, 「戰時生活 隨感」 및 「文壇使節 歸還報告 - 皇軍慰問次 北支에 다녀와서」라는 좌담기록물에 관하여

위 산문과 좌담기록물 등은 그 내용상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과의 직접 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위 산문 등을 발표하고 좌담회에서 발언한 행위는 김동인에게 반민특별법상의 주도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4) 김동인의 내선작가 간담회 참석행위, 경성중앙방속국에서 작품 낭독행위

김동인이 1941. 11. 15. 조선문인협회 주최 내선작가 간담회에 참석한 사실, 1941. 12. 경 경성방송국 제2방송부(우리말 방송부)에서 시국적 작품을 낭독한 사실은 앞서 인정한 바와 같으나, 구체적인 발언내용이나 낭독 작품 내용에 관한 아무런 증거가 없으므로 위 행위만으로 김동인에게 반민특별법상의 주도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5) 소결론

이 사건 처분 중 반민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관한 부분은 앞서의 (3), (4)항과
같이 일부 처분 사유가 인정되지 않으나, 김동인이 매일신보 등에 「백마강」, 「국기(國
旗)」, 「북지전선을 향하여」, 「조선 문단과 내가 걸었던 길」, 「태평양송」, 「감격과 긴장
」, 「신일본권」, 「총동원 태세로」를 발표한 행위가 반민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되
는 이상 이 사건 처분 중 위 부분 역시 적법하다.

(마) 반민특별법상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의 의미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이를 평가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이미 지나간 어떤 행위의 구체적 동기나 그를 둘러싼 사실관계를 정확히 규명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 흐름에서 볼 때, 한 시대를 살았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지도자들이 수행하였던 역할은 시간이 흐를수록 역사 앞에서 그 공과가 분명해지고 그로 인한 역사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민족이 위기에 처하여 그 존망이 풍전등화의 위험에 있을 때에는 그 지도자들의 책임은 커질 수밖에 없고 그가 가진 비전과 처신에 따라 민족공동체의 운명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민족공동체의 입장에서 지난 과거를 되돌아보고 그 시대 역사적 주역들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결코 자신은 아무런 흠이 없는 떳떳한 입장에서 남을 정죄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요, 함께 반성하며 후손들 앞에 국가의 대계를 세우고 내일의 비전을 바르게 세우자는 것이요, 오직 역사의 거울 앞에 우리 민족공동체의 부끄러운 모습을 바로잡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한 개인에 대하여 단지 책임주의의 입장에서 기대가능성이나 비난가능성을 따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의 눈으로 반민족 행태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어떻게 귀결시킬 것인가를 찾아야 할 것이고, 그 결과를 내일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 오랜 우여곡절과 산고를 거쳐 제정·시행된 반민특별법은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여 정의로운 사회가 실현될 수 있도록 공동체의 윤리를 정립하고자 하는 공익을 목적으로 하고 있고, 그 대상도 특정한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만을 판단하는 것일 뿐이므로, 설령 특정인의 특정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더라도 이것이 그 개인에 대한 전인격적인 평가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사건 처분이 비록 적법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일제 말기 특정시기의 김동인의 산문과 일부작품 및 그의 행동이 반민특별법이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고, 그것이 작가 김동인의 문학적 진실에 대한 선언이나 그의 전 생애에 대한 평가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둔다.

4. 결 론
그렇다면 제1심판결은 정당하므로, 원고의 항소는 이유없어 이를 기각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재판장 판사 곽종훈
판사 양대권
판사 손동환

관 련 법 령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1조 (목적)
이 법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를 위하여 행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정의)
이 법에서 "친일반민족행위"라 함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말한다.

1.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2.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
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3.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4.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그 단체의 의사결정을 중
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활동을 주도한 행위
5.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저해한 행위
6. 을사조약·한일합병조약 등 국권을 침해한 조약을 체결 또는 조인하거나 이를 모의한 행위
7.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
8. 일본제국의회의 귀족원의원 또는 중의원으로 활동한 행위
9.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행위
10.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少尉)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1.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宣傳)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12.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주도적으로 부녀자를 강제동원한 행위

13.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4.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수행을 돕기 위하여 군수품 제조업체를 운영하거나 대통령령이 정
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15. 판사·검사 또는 사법관리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6. 고등문관 이상의 관리,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학대하
는 등 탄압에 적극 앞장선 행위
17. 일본제국주의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의 장 또는 간부로서 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18. 동양척식회사 또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우리민족의 재산을 수탈
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
19.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
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
20.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에 의한 민족문화의 파괴·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반출에 적극 협력한 행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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